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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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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터에 내려놓은 왕좌

광나루, 즉 광진은 예전에는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광나루였다. 또한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데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하다.

잠실대교, 올림픽대교와 지금은 해체된 광진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 척 나룻배에 의지해 건널 수 밖에 없는 넓은 강폭을 가진 곳이었다.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다.

광나루는 한편으로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다. 태종과 장남인 양녕의 부자지정이 한강 푸른 물에 녹아져 흐른 것이다.

양녕대군은 태종 4년(1404)  9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거나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에 대해 태종이 여러차례 꾸지람을 하였지만 양녕대군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가도 잠시 후에 다시 향락에 빠져들었고, 당시의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왕세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우 충녕대군의 인품과 독서, 그리고 학식과 군사에 대한 지식은 그를 뛰어 넘어 여러 신하들과 태종의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을 거스리는 행동을 곧잘하여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태종에게 문책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태종과 세자 양녕대군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자 태종 18년(1418) 6월, 황희(黃喜), 이직(李稷)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그리고 유정현(柳廷顯) 등 여러 신하들은 태종의 뜻대로 충녕을 새로이 세자로 정하는데 찬의를 표하였다.

태종은 이와 같은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모든 일은 미리 마련한대로 하나하나 절차를 밟아 이루어졌으나, 겉으로는 세상 사람의 비난이나 물의가 일지 않도록 극히 광명정대하게 또 정중하게 법도를 따랐다.

곧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며칠 사이에 계속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올라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강물이 줄어들 동안까지 사제(私第)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정현 등은 "서울에 머무는 일은 불가하옵니다." 하고 우겼다.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곧 광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비자(婢子) 열 세 사람과 노자(奴子) 몇 사람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가지 가재(家材)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경은 무슨 일로 나를 따라 오는가?" 하고 물었다.

원 윤은, "호송하라는 분부이시옵니다." 하니, 양녕대군은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다.

작별할 때 원윤에게 말하길,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런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랏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호송을 하던 원윤은 양녕대군의 일행 가운데 여자의 숫자가 나라에서 정해 준 인원보다도 많다고 하여 두 사람의 여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 보고를 들은 태종은, " 그 두 여자도 다 양녕의 첩이다. 빼앗아 온 것은 경의 잘못이다." 하고, 곧 광나루로 되돌려 보내주도록 명하였다.

광주로 물러 나간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論語)와 대학(大學)만을 갖고서 읽게 하였다.

6월 그믐께, 태종은 양녕대군의 생활 형편과 그 행동거지를 살펴보도록 내관 최한(崔閑)을 광주로 보냈다. 광주에서 돌아온 최한은 양녕대군의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한적한 생활을 보고하였다.

태종이 처음 양녕대군을 떠나보낼 때, "너야 충녕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일생 편히 잘 지내게 될 것이다." 하며,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세종)에게 형제의 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타일렀고, 그의 동생인 세종은 그를 극진히 위하여 다른 대신들의 비판과 간(諫)하는 소리들을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양녕대군의 눈물이 서려 있는 광나루는 지금은 흔적없고 다만 하나의 표석(標石)만이 이곳이 광나루였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쉐라톤 워커힐호텔 정문 쪽 아래 생도량이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광나루 혹은 버드나무 나루이며, 강 건너로는 강동구의 암사동과 잠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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